“성경과 코란은 뿌리가 같아요”

2008년도 딱 닷새 남았다.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지난 일년 얼마나 잘 살았나를 따져보는 기준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나는 긴급구호팀이니 올 한 해 어느 현장에서 무슨 일을 했는가가 중요하다. 개인적으로는 어떤 사람을 새로 사귀고 어떤 책을 읽었는지도 중요하다. 그러나 크리스천으로서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했는가가 무엇보다 중요한 기준일 거다. 나는 이 일을 하기에 매우 적합한 직업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구호 현장은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최전선이요, 구호팀장은 그 일의 선봉장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현장에서 성경을 가지고 현지 주민을 대상으로 전도한다는 말은 절대로 아니다. 구호 현장에서 특정 종교를 앞세워 구호 활동을 하는 것은 '모든 사람은 종교, 성별, 정치사회적 입장 등과 상관없이 공평하게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국제인권법과 인도적 지원에 관한 행동강령에 정면으로 위배될 뿐 아니라 오히려 기독교에 대한 오해와 반감만 부추기기 십상이다. 다만 우리는 현장 주민들에게 우리의 행실을 통해 주님의 사랑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첫 파견지였던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일이다. 전쟁이 끝나고 탈레반이 물러갔지만 그 세력의 뿌리가 워낙 깊은 터라 우리가 기독교 단체라는 사실을 공공연히 드러낼 수 없었다. 현지 직원들이 탈레반 잔당인지 비밀요원인지 알 수 없는 일이므로 바깥은 물론 사무실이나 숙소에서도 조심해야 했다. 국제직원들은 각자 알아서 몰래 신앙생활을 해야 했고 나 역시 성경읽기 전에는 방문을 잘 잠갔나 확인하고 식전 기도도 속으로만 했다.

그러나 기쁜 부활절마저 그렇게 할 수는 없는 일. 위험을 무릅쓰고 다른 구호단체의 기독교 신자들을 우리 숙소에 초대해 조촐하게 부활절 예배를 보기로 했다. 개신교, 천주교, 성공회 신자 등 20명 정도가 모였다. 회의하는 것처럼 보이려고 차트와 칠판도 갖다놓았다.

숨어서 드리는 예배라 그런지 더욱 경건하고 말씀이 마음 깊숙이 파고들었다. 여기까지는 좋았는데, 마무리 기도를 부탁받은 사람이 갑자기 울먹이며 목소리를 높이더니 급기야 부흥회에서 하듯 쩌렁쩌렁한 소리로 목청껏 기도하는 게 아닌가? 아, 누가 듣고 쫓아오면 어쩌라고…. 아니나 다를까, 그 소리에 놀라 쫓아온 직원 한 명이 회의실 문을 활짝 열었다. 그 직원이 책상에 놓인 성경과 십자가를 보았음이 분명했다. 사람들의 얼굴에 당황하는 빛이 역력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날 저녁, 아슈라프라는 직원이 나를 좀 보자고 했다. 30대 초반의 이 직원은 늘 웃는 얼굴에 지적이고 융통성이 많지만 종교적으로는 대단히 보수적이고 타협이 없는 사람이었다. 특히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믿는 기독교에 대해서는 적의에 가까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웃음을 거둔 얼굴로 따지듯 물었다.

"당신들은 무슬림이 아니지요?" 뜨끔했지만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다.

"네, 아니에요."

"그럼 당신들은 무엇을 믿는 거죠?"

"하나님을 믿어요."

"당신들의 하나님은 당신들에게 도대체 무엇을 가르치나요?"

이 질문을 할 때는 따진다기보다 정말로 궁금해서 묻는 것 같았다. 갑자기 용기가 생긴 내가 이렇게 대답했다.

"서로 사랑하라고요. 말 나온 김에 우리 하나님이 주신 십계명에 대해 한번 들어보실래요?"

나는 그를 부엌 한켠으로 데려가 난생 처음 이교도에게 십계명을 하나씩 짚어가며 설명해 주었다. 아슈라프는 말끝마다 발레, 발레(아, 그렇군요.)를 연발하며 신기해했다. 그 맞장구에 신이 나서 구약성경과 코란은 뿌리가 같고 마리아(미리암)나 사라 등 아프가니스탄에서 흔한 이름들이 다 구약성경에 나온다고 하니까 눈이 휘둥그레진다. "십계명도 그렇고 알고 보니 기독교는 우리와 참 많이 비슷하네요." 나 역시 아슈라프가 믿는 신이 무엇을 어떻게 가르치는지 궁금해졌다. 그날 이후 우리는 자주 부엌에서 성경 이야기와 코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놀라운 일은 기회있을 때마다 기독교에 대해 온갖 독설을 퍼붓던 아슈라프가 언제부턴가 잠잠해졌다는 점이다. 나아가 다른 직원들이 기독교에 대해 나쁘게 얘기할 때면 번번이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렇게 단정적으로 말하는 건 옳지 않다며 두둔하기에 이르렀다. 참말이지 아슈라프의 기독교에 대한 이해와 호감이 높아지고 내가 이슬람교의 가르침을 존중하면 할수록 사무실 분위기도 점점 좋아졌다. 하나님이 부활절 예배를 아슈라프에게 들키게 하신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나는 구호 현장에서 기독교에 대한 오해와 반감을 없애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리는 첫 단계라고 생각한다. 땅이 꽁꽁 얼어있는데 막무가내로 씨를 뿌린다고 싹이 트겠는가. 구호 활동은 바로 사랑으로 이 언 땅을 녹이는 일이다. 그러니 구호 현장은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는 최전선이랄밖에.

긴급구호요원은 현장에서 더욱 빛이 나고 힘이 난다. 하나님 아들, 딸로서 그분의 사랑을 온몸으로 전할 수 있는 기쁨 때문일거다.

월드비전 긴급구호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