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2011년 9월 20일자

"이라크 현지사정은 아주 안좋아요. 민간 구호팀이 민간인 복장을 하고 왔다갔다 해도 폭탄이 날아듭니다. 이라크를 다녀왔고, 곧 다시 갈 사람으로서 이야기하자면 전쟁터보다 더 위험한 현장입니다"

"바람의 딸"이란 별명의 오지여행가에서 긴급구호 활동가로 변신해 지금은 "구호천사"로 세계를 누비는 한비야씨(45)는 이라크의 사정을 이렇게 전했다. 3년 전부터 구호사업에 뛰어든 한비야씨의 공식직함은 기독교 국제구호단체인 "월드비전"의 긴급구호팀장.

요즘은 이라크 북부 모술지역에서 식수 개발사업에 주력하고 있다. 모술은 후세인 전대통령의 두 아들이 사살됐다는 소식이 전해진 곳. 지금도 언제 어디서 총알이 날아들지 모르는 최전선이다.

지난 6월 중순부터 현지에서 두달 가량 활동하다 잠시 귀국한 한씨는 다음달 이 "전쟁터"로 돌아가 모래바람과 섭씨 55도를 웃도는 살인적인 더위 속에 천근 같은 방탄조끼를 껴입고 구호활동에 다시 뛰어든다.

"우리가 모술지역에서 활동하는 유일한 구호단체였는데, 우리한테도 폭탄이 날아들었어요. 미군은 인명피해가 그칠 날이 없어요. 그렇다고 그들을 외면할 순 없잖아요" 한씨는 깨끗한 물을 마시지 못해 목숨을 잃기까지 하는 사람들에게 물을 대주는 것은 결국 생명을 살리는 일이라고 들려준다.

이란과의 오랜 전쟁, 1991년 걸프전, 12년간 지속된 유엔 경제제재 등으로 상수도 시설이 파괴되고 관리가 제대로 안돼 물구경하기가 여간 힘들지 않단다. 수돗물은 5일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하고 식수대와 화장실이 아예 없는 학교가 있을 정도로 사정이 심각하다고 전한다.

"식수보다도 더욱 큰 문제는 치안부재죠. 이라크인은 자유를 찾은 대신 안전을 잃었다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전쟁 직전 후세인이 죄수 12만여명을 석방한 것도 이런 치안부재를 부채질한 요인이랍니다. 전기도 하루에 서너 시간밖에 안들어와요"

우리 사회의 최대 이슈 중 하나로 떠오른 이라크 전투병 파병 문제에 대해 그는 민간구호단체에서 활동하고 있는 자신의 입장이 신경쓰이는 듯 "현장에서 일해본 사람으로서 볼 때"라고 토를 단 뒤 "전투병을 파병하면 전쟁터에 보내는 것과 똑같다. 오히려 더 위험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조심스레 말했다.

그러면서 "인도적인 구호단체의 입장에서 보면 공병이나 의료병 등 비전투병이 가면 상수도 사업이나 전력 복구사업 등 현지 민간인들과 함께 구호차원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것"이라고 구호활동가다운 염원을 슬쩍 내비쳤다.

"미군 정찰차에 폭탄이 날아와 화염이 치솟는 걸 직접 목격하기도 했다"는 한씨는 "외국인에 대해서는 하나같이, 심지어 인도적 구호단체 회원들까지도 모두 미군의 협력자로 기정사실화하고 공격대상에 포함시킨다는 것이 문제"라고 우려했다.

세계일주를 하고 싶었던 어릴 적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국제홍보회사에 잘 다니다 "때려치우고" 오지여행을 떠나 다양한 세계견문록으로 독자를 만났던 한비야씨. 그런 그가 지구촌 곳곳의 상처를 보듬는 "구호천사"로 변신한 데는 93년 아프가니스탄을 방문한 게 계기가 됐다.

"그때까지는 긴급 구호활동이나 난민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어요. 어느날 내전이 계속되고 있는 아프가니스탄의 한 난민촌에 들러 아이들과 재미있게 놀고 난 뒤였어요. 왼쪽 다리와 오른쪽 팔이 잘려 나간 여자아이가 건네준 빵을 받아 먹었더니 같이 있던 아이들이 손뼉치고 환호를 하더라고요. 그때 가슴 밑바닥에서 뜨거운 것이 솟아올라왔어요. 그날 결심했죠. 난민기구에서 아이들을 위해 저를 헌신하기로 말입니다"

한씨는 자신의 목숨이 날아갈지도 모르는 위험한 현장에 뛰어들어 수많은 사람들을 살리는 일을 하는 긴급구호에 대해 이루 다 표현할 수 없는 보람을 느낀다고 말한다. 이라크는 한씨의 89번째 방문국. 지난 6월 이라크에 들어가기 전만 해도 그저 중동의 한 나라로만 생각했단다. 그러나 지금은 그에게 너무나 소중한 나라가 됐다고 한다.

"이라크는 석유매장량 세계2위로 잘 살던 나라였어요. 세번의 전쟁으로 사회기반이 무너진 거죠. 국민들은 교육수준도 높고 평화도 염원하고 있어요. 좋은 지도자가 나오면 예전의 영화를 되살릴 수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월드비전의 긴급구호팀장이 안됐다면 지금쯤 "배타고 지구 세 바퀴 반 돌기"

"세계 6,000m이상 고지 다 올라가기"에 매달려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한비야씨. 내년에는 "씨감자 사업"을 본격화하기 위해 북한을 방문할 계획이다. 씨감자 농장이 조성돼 본격적으로 생산되면 북한의 식량난 해소에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배를 곯아 쓰러지는 사람들이 있는 한 "구호천사" 한씨에겐 북한도 긴급구호의 현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