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독서편지]

지난 6월부터 이라크서 긴급구호활동

"이라크 현지사정은 전쟁 때보다도 훨씬 위험해요. 이라크를 다녀왔고, 곧 다시 갈 사람으로서 이야기하자면 전쟁터보다 더 위험한 현장입니다."

"바람의 딸"이란 별명을 달고 다니는 오지여행가에서 긴급구호 활동가로 변신해 지금은 "구호의 딸"로 세계를 누비는 한비야(45)씨는 구호사업을 펼치고 있는 이라크의 사정을 이렇게 전했다.

3년 전부터 구호사업에 뛰어든 한비야 씨의 공식직함은 세계최대의 기독교 사회복지기관인 "월드비전"의 긴급구호팀장이다. 요즘은 이라크 식수 개발사업에 주력하고 있다.

지난 6월 중순부터 이라크 북부 모술지역에서 두 달 가량 이 사업을 펼치다 잠시 귀국한 한씨는 다음달 이 "전쟁터"로 돌아가 섭씨 55도를 웃도는 살인적인 더위에도 천근같은 방탄조끼를 껴입고 구호활동에 다시 뛰어들어야 한다.

"위험지대인 "코드 레드"를 안방처럼 드나드시네요."

"우리가 모술지역에서 활동한 유일한 구호단체였는데, 우리한테도 폭탄이 날아들었어요. 미군은 인명피해가 그칠 날이 없어요. 그렇다고 그들을 외면할 순 없잖아요?"

한씨는 깨끗한 물을 마시지 못해 목숨을 잃기까지 하는 사람들에게 물을 대주는 것은 결국 생명을 살리는 일이라고 들려준다. 이란과의 오랜 전쟁, 1991년 걸프전,12년간 지속된 유엔 경제제재 등으로 상수도 시설이 파괴되고 관리가 제대로 안돼 물구경하기가 여간 힘들지 않단다.

"식수가 해결되면 다른 어려움은 없나요?"

"가장 큰 문제는 치안부재죠. 이라크인은 자유를 찾은 대신 안전을 잃었다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전쟁 직전 후세인이 죄수 12만여 명을 석방한 것도 이런 치안 부재를 부채질한 요인이랍니다. 전기도 하루에 서너 시간밖에 안들어와요."

문답이 오가다 우리 사회의 최대 이슈 중 하나로 떠오른 이라크 전투병 파병 문제가 자연스럽게 대화 테이블에 올랐다. 민간구호단체에서 활동하고 있는 자신의 직책이 신경쓰이는 듯 "현장에서 일해 본 사람으로서 볼 때"라고 토를 단 그는 "전투병을 파병하면 전쟁터에 보내는 것과 똑같다. 오히려 더 위험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조심스레 말했다.

그러면서 "인도적인 구호단체의 입장에서 보면 공병이나 의료병 등 비전투병이 가면 상수도 사업이나 전력복구 사업 등 현지 민간인들과 함께 구호차원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것"이라고 구호전문가다운 염원을 슬쩍 내비쳤다.

"미군 정찰차에 폭탄이 날아와 화염이 치솟는 걸 직접 목격하기도 했다"는 한씨는 " 외국인에 대해서는 하나같이, 심지어 인도적 구호단체 회원들까지도 모두 미군의 협력자로 기정사실화하고 공격대상에 포함시킨다는 것이 문제"라고 우려했다.

"내년에는 "씨감자 사업"을 본격화하기 위해 북한을 방문할 계획입니다. 씨감자 생산농장이 조성돼 내년부터 본격적으로 씨감자가 생산되면 북한의 식량난 해소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믿어요."

세계일주를 하고 싶었던 어릴 적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국제홍보회사에 잘 다니다 "때려치우고" 오지 여행을 떠나 다양한 세계견문록으로 독자를 만났던 그다. 그런 그가 지금은 "구호천사"로 변신해 지구촌 곳곳의 상처를 보듬는 데 에너지를 쏟아붓고 있다. 인터뷰 내내 생기넘치는 목소리로 "긴급 구호 일이 너무나 재밌다"고 몇번이나 강조하는 그에게서 "물 만난 고기" 같다는 인상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전쟁터"같은 이라크에서 왜 철수하지 않나요?

▲우리가 구호사업을 포기하고 철수하면 현지 이라크인들은 깨끗한 물을 마시지못하고 제대로 씻지도 못해 전염병에 노출되고 말 것입니다. 깨끗한 물을 못마시면 설사병에 걸려 탈수로 목숨을 잃기도 하죠. 심지어 식수대와 화장실이 아예 없는 학교가 있을 정도로 사정이 심각합니다. 수돗물을 5일에 한번 구경하기도 힘들 정도예요. 우리 긴급구호팀은 이 나라가 제대로 자리를 잡을 때까지 적어도 2년간은 현지인들과 어려운 고비를 함께 넘길 작정입니다.

이라크 내 구호사업을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시죠.

▲월드비전은 이라크 북부 모술과 서부 알룻바에서 난민과 어린이 보호사업과 학교 식수위생사업을 펼치고 있습니다. 170여 개 초.중학교에 식수대와 화장실을 설치하는 사업이죠. 파괴된 수도관을 연결하고 수도가 없는 곳에는 우물을 파고 물탱크를 설치하는 것이 주된 임무죠.

현지 사정은 어떻습니까?

▲굉장히 나빠요. 이라크인들의 미국에 대한 불신, 반미감정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뿌리가 깊어요. 민간 구호팀이 민간인 복장을 하고 왔다갔다 해도 폭탄이 날아듭니다.

이라크에 집착하시는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지….

▲지난 6월에 이라크에 들어가기 전만 해도 이라크는 그저 중동의 한 나라에 불과했어요. 지금은 내게 너무나 소중한 나라가 됐어요. 이라크는 석유매장량 세계2위로 잘살던 나라였어요. 세 번의 전쟁으로 사회기반이 무너진 거죠. 국민들은 교육수준도 높고 평화도 염원하고 있어요. 좋은 지도자가 나오면 예전의 영화를 되살릴 수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오지여행 하다가 구호전문가가 된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1993년 세계여행을 떠나기 전까지는 긴급 구호활동이나 난민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어요. 그런데 수십년간에 걸친 내전과 기근, 홍수로 얼룩진 아프리카를 종단하던 내 눈에 난민들이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어느날 내전이 계속되고 있는 아프가니스탄의 한 난민촌에 들러 아이들과 재미있게 놀고 난 뒤였어요. 왼쪽 다리와 오른쪽 팔이 잘려 나간 여자아이가 건네준 빵을 받아 먹었더니 같이 있던 아이들이 손뼉치고 환호할 때 가슴 밑바닥에서 뜨거운 것이 솟아 올라왔어요. 그날 결심했죠. 난민기구에서 아이들을 위해 나를 헌신 하기로 말입니다.

긴급구호가 그렇게 재미있으세요?

▲목숨이 위태로운 긴장속에서 매일 일하는 것이 긴급구호예요. 실제로 목숨을 걸고 일을 합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구호활동할 때 바로 뒤가 다 지뢰밭이었다는 걸 나중에 알고 전율을 느꼈죠. 누가 시켜서 한다면 못하겠죠. 하다가 죽어도 좋다는 마음가짐이 없다면 못할 일입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진짜로 너무 재미있어요. 수천, 수만 명을 살리는 데 일조하는 일이니까요. 벼랑 끝에 매달려 있는 사람들을 끌어올려 살리는 그 기쁨을 어디에다 비유할 수 있을까요.

긴급구호 일은 언제까지 하실는지….

▲긴급구호도 따지고 보면 사고가 난 뒤 사후처방의 성격이 담겨 있잖아요. 환자에게 수술해 주는 것과 같죠. 그런 점에서 보면 병이 걸리기 전에 미리 예방하는 일도 중요하겠죠. 그런 차원에서 전쟁 같은 걸 사전 예방하기 위한 평화운동 같은 것도 의미있다고 봐요. 이 길을 끝까지 가다보면 또 다른 길을 만나겠죠.

월드비전의 긴급구호팀장이 안됐다면 뭘하고 있었을 것 같나요?

▲지금 긴급구호일에 푹 빠져 있어선지 다른 일이 눈에 들어오지 않지만 만약 다른 일을 하고 있다면 "배 타고 지구 세 바퀴 반 돌기", "세계 6천ｍ이상 고지 다 올라가기"에 매달려 있었을지도 몰라요.

항상 그렇게 원기가 넘쳐 나세요?

▲사람의 에너지가 한정돼 있다고 하는데 그게 아닌 것 같아요. 에너지는 다 써 버리면 없어지는 항아리에 담겨 있는 물이 아니라 쓸수록 새로운 물이 채워지는 샘물 같은 것 아닐까요? 지금 하고 있는 구호일을 하면서 하루하루 에너지를 남김없이 다 쓸 작정입니다. 저녁에 에너지가 남아 있으면 화가 나요.

지금까지 방문한 나라는 얼마나 되는지요.

▲이라크가 89번째 방문국입니다. 내년에는 북한에 갈 계획이에요. 북한도 긴급구호 현장이거든요. 월드비전이 96년부터 북한관련 사업을 하면서 돕고 있는데 국수 공장을 가동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이동병원도 운영하고 있어요. 내년부터 본격적으로 씨감자를 생산하면 북한의 식량난 해소에 도움을 줄 것으로 믿어요. 북한 사업팀이 따로 있지만 긴급구호팀도 내년부터 씨 감자 사업에 뛰어들 겁니다. 북한동포들이 식량난으로 배를 곯고 있으니 인도적 구호단체인 우리가 가만히 있을 수 없죠. 사람이 살권리가 인권 아닌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