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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 가장 취악한 아동·가정·지역사회가 빈곤과 불평등에서 벗어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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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 가장 취악한 아동·가정·지역사회가 빈곤과 불평등에서 벗어나도록

[조선일보] [아침논단] 사랑과 은혜의 법칙
2006.11.20

[아침논단] 사랑과 은혜의 법칙

[조선일보 2006.4.23.]

▲ 한비야 월드비젼 긴급구호팀장

“네에? 뇌에 기생충이 있을지도 모른다구요?”

자꾸만 현기증이 나서 뇌 사진을 찍었다가 날벼락을 맞았다 . 해외 오지나 긴급구호 현장에서 잘 익히지 않은 고기를 먹었으면 만에 하나 그럴 수 있다면서, 당장 몇 가지 정밀 검사를 해야 한단다. 바로 입원하여 등뼈에서 척수를 빼서는 기생충 검사를, 눈에 형광물질을 넣고는 혈류검사를 하는 등 일련의 검사를 받았다.

“인간복제도 한다는 세상에 그까짓 기생충 박멸을 못하겠어요?”

이렇게 큰소리치며 가족과 지인들을 안심시켰지만 나라고 왜 걱정이 안 되겠는가. 만일 성충이 여기저기 알을 까고 다니는 경우, 완치가 요원하다는 말도 신경 쓰이고, 나의 ‘기생충 사건’이 해외 긴급구호에 쏟아지기 시작한 젊은이들의 관심을 조금이라도 위축시키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컸다.

어쨌거나 난생 처음 해보는 입원 생활은 ‘오지체험’ 그 자체였다. 몇 시간 기다렸다 겨우 1~2분 만나기도 어려운 전공의가 아침마다 내 침대까지 왕진 오는 것도 그렇지만,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릴 때나 물건 살 때 사람들이 순순히 양보해 주는 것은 정말 신기했다. 환자복을 입은 나는 적어도 병원 안에서는 누군가가 돌봐주어야 할 약자인 것이다.

신체 건강한 젊은이에 비하면 그렇겠지. 그러나 누운 채 산소마스크를 하고 호스를 통해 음식을 넣어야 하는 옆방 환자에 비하면 난 얼마나 건강한 사람인가. 또 나는 다리가 부러져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환자의 컵라면 심부름을 할 수 있을 만큼 건강하고, 그 휠체어 환자 역시 누워 있는 더 중한 환자에게 물을 먹여줄 수 있을 만큼은 건강한 거다.

병원에 있으면서 재차 확신했다.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보면 한없는 약자 같지만,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보면 갑자기 강자가 된다는 사실을. 또한 그 강자의 힘으로 약자를 누르는 대신 보살피고 응원하는 것이 얼마나 멋있고 마땅한 일인가도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엄밀히 보면 이렇게 강자가 약자에게 베푸는 배려는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의 법칙과는 사뭇다르다. 수많은 통로를 통해 우리는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정글의 법칙이라고 배운다. 이런 세상의 생존법은 딱 두 가지다. 이기거나 지거나, 먹거나 먹히거나. 그러나 6년째 구호활동을 하면서 세상은 ‘정글의 법칙’이 아니라 ‘사랑과 은혜의 법칙’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알고 보니 우리 서로는 눌러 이겨야 하는 경쟁의 대상이 아니라 가진 것을 기꺼이 나누고, 할 수 있는 것을 기꺼이 해주는, 사랑의 대상이었다.

세상에는 절대 강자도 절대 약자도 없다. 개인도 단체도 나라도 마찬가지다. ‘나도 가진 게 없는데 돕기는 누굴 도와 !’ 혹은 ‘우리나라도 도울 사람 많은데 외국까지 뭘!’이란 말은 이제 그만 들었으면 좋겠다. 대신 혹시 내 눈높이가 너무 높은 건 아닌가를 먼저 살펴볼 일이다. 내가 속한 단체가 꿈꾸는 세상은 굶는 아이가 없는 세상, 1000원 미만으로 예방할 수 있는 병에 걸려 죽는 아이가 없는 세상, 모든 아이가 기초교육을 받을 수 있는 세상이다. 이 정도는 우리의 눈높이를 옆으로, 아래로 조금만 조절한다면 충분히 만들 수 있는 세상이라고 굳게 믿는다.

진짜 전쟁에서는 총알 한 방이 사람을 죽이고 살리지만 구호전쟁에서는 200원짜리 영양죽 한 그릇, 1000원짜리 링거 한 병이 아이들의 생사를 가른다. 지금 우리 주머니 안에 1000원이 들어있다면 우린 정말로 힘센 사람들이다. 그 돈 이 구호현장에서는 사람의 목숨도 살려내는 큰 돈이기 때문이다. 사실이 이럴진대 우리 중 누가 아직도 스스로를 약자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각종 검사가 끝나고 일주일간의 ‘약자체험’도 막을 내렸다. 잠정결론은 기생충 감염도 아니고 뇌혈관, 혈류도 정상이란다. 입원 중 아무 치료도 하지 않았는데 퇴원하자마자 몇 달간 괴롭히던 현기증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일체유심조(一切唯心造)라. 세상 모든 일이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말은 어떤 경우에도 유효한가 보다.

한비야 월드비전 긴급구호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