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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바람의딸" 한비야 "사막모래, 밀가루였으면"
2007.03.30

"바람의딸" 한비야 "사막모래, 밀가루였으면"

[매일경제 2007-03-11 20:02]

"여기는 처음으로 긴급구호를 위해 밟았던 아프가니스탄 땅이고요. 여기는 말라위와 잠비아, 저기는 제 큰 양딸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에티오피아예요."

"바람의 딸" 한비야가 눈 앞에서 지구본을 돌리며 자신의 발자취를 친절히 소개했다. 홀로 오지를 탐험하던 자유인이 한자리에 정착한 지 벌써 7년째.

세계적 구호단체인 월드비전의 긴급구호 팀장으로 자리를 옮겼지만 그는 여전히 세계를 안방 드나들 듯한다.

이곳에 와서 탄 국제선 비행기만 148대고, 어떤 때는 군용기, 유엔 전용기, 화물기, 헬리콥터, 6인승 경비행기에도 몸을 실었다.

다니는 곳은 10년 전과 비슷하지만 한 가지 크게 바뀐 게 있다.

"지금껏 다른 사람 몫은 뺏지 않더라도 내 몫은 챙기고 살아야 한다고 여겨왔어요. 하지만 42세가 넘어서자 정글의 법칙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란 생각이 들더라고요. 문득 깨달았죠. 우리 세상은 정글의 법칙과 사랑의 은혜, 이 두 바퀴가 있어야 돌아간다는 사실을요."

눈시울이 붉게 물든다. 회상에 젖어든 걸까. 숱한 나라를 돌아다니며 숱한 사람들을 만났지만 그의 머릿속엔 잊혀지지 않는 까만 눈망울의 소녀가 들어 있다.

오지를 탐험하던 한비야는 96년 아프가니스탄 북부 헤라트에 있었다.

무장한 탈레반이 거리를 활보했지만 씩씩하게 여자 아이들과 그림을 그리며 놀고 있던 터였다. 이때 왼쪽 다리와 오른팔이 없는 한 여자 아이가 다가오더니 수줍게 빵을 내밀었다.

귀중한 빵 한 조각. 지뢰가 터져 반쪽이 없는 소녀는 자기와 놀아준 이방인 친구에게 언제 얻을지 모르는 양식을 기꺼이 나눴다.

여행이 끝나면 난민을 위해 일하리라 굳게 마음 먹었던 그는 놀랍게도 꼭 6년 만에 아프가니스탄 헤라트에 다시 섰다.

긴급구호 팀장으로 난민들을 돕기 위해서다.

"세상에 음식이 충분히 있다고 하는데 여기 아이들은 굶어서 죽어 가는 거예요. 어느 날은 한 마을에 갔더니 한 엄마가 아이에게 시금치 같은 풀을 먹이고 있어요. 그런데 알고 보니 독초라서 그걸 먹으면 눈이 먼다고 하더라고요. 이 엄마가 제 정신인가 싶어서 이거 독초라고 말렸더니 "이것을 먹고 죽으나 안 먹고 죽으나 마찬가지"라는 거예요."

참상을 목도한 그는 밖으로 뛰어나와 흐느껴 울어야 했다. "먼지가 휘날리니까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아~ 저 먼지가 다 밀가루였으면…"."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 덕에 힘든 줄 모르고 달려왔다. 씩씩하게 웃으며 말하는 그에게 좌절을 모르는 것 같다고 하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아무리 열심히 엎질러진 물을 닦아내더라도 누군가가 한쪽에서 수돗물을 계속 흘려버리면 허탈해지잖아요. 이라크에 상수도를 복구했었는데 아마 지금은 내전이 발발해 없어졌을 거예요. 끊임없이 이런 식이죠. 누군가가 닦아놓으면 누군가가 흩뜨리죠."

세계를 누비며 이웃과 대화하는 덕에 한비야는 요즘 청소년 사이에서 하나의 아이콘이 됐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원더우먼이 따로 있을까.

하지만 한비야는 청소년을 동지라 부른다. "걔네들한테 제가 엄마나 이모뻘일텐데도 길에서 언니 누나 라고 부르며 달려오는 걸 보면 틀림없이 저와 동지애를 느끼는 거죠. 한번은 지하철에서 부끄러워 얼굴이 벌겋게 된 한 여학생이 제 손에 6만원을 꼭 쥐어주는 거예요. 제 소식을 듣고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라고 옷 사려고 모아둔 돈을 맡긴 거죠. 이럴 땐 정말 벽과 천장을 없애고 아이들과 소통하는 기분이 들어요."

50대엔 난민을 위해 일하지만 60대에 접어들면 우리 청소년에게 아낌없이 내어줄 계획이다.

"세계시민학교에서 활동하고 싶어요. 세계시민의식이 부족한 우리 청소년들에게 세계시민으로서 살아가야 할 방법을 가르치는 거예요. 제가 50명을 가르쳐 선생님으로 양성하면 그들이 다시 50명을 가르치는 거죠. 그들이 세계무대에서 활약할 때면 1000만명 정도가 세계시민의식을 지닐 수 있겠죠. 우리라는 범위에서만 살아가는 삶은 너무 답답하잖아요."

[이상덕 기자]